길을 잃고 나서야 찾는 것들
By 이웃집편집장
2017-11-03 14:50:22 2604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과 학자의 일과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미로에서 길을 찾는 것과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더 이상 정주하는 농경 사회가 아니므로 어제의 진리는 오늘의 기만이 되기 십상이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길이 미궁의 막다른 길로 향하고, 어머니가 바랐던 길이 미궁의 입구로 되돌아가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이다. 


내가 미로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며 정답을 확신하는 선동가들이 미로 곳곳에서 우리를 미혹하고, 미로에서 길을 찾는 내 발걸음에 나는 매번 확신이 없다. 애초에 미로의 출구로 이어지는 올바른 방향이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출구 없는 미로.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무한히 펼쳐지는 '도서관'으로서의 세상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의 석판화  <상대성>


미로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문학을 다시 읽는다. 그의 문학은 흔히 미로에 비유된다. 그의 단편 소설들은 일반적인 소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때로는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작품은 다른 텍스트나 그의 다른 작품을 참조하기도 하는 식으로, 이리저리 작품의 구조를 꼬아놓은 경우도 많다. 전통적인 소설 문법에 익숙한 독자들은 그의 소설을 읽으며 길을 잃는다.


우주 (다른 사람들은<도서관>이라 부르는)는 부정수 혹은 무한수로 된 육각형 진열실들로 구성돼 있다.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은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짧은 단편이지만, 그의 문학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하지만, 보르헤스 문학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특성들을 짧은 길이 안에 모두 보여준다. 무한히 이어지는 육각형 진열실로 구성되어 있다는 '도서관'으로 상징되는 묵시록적인 신비한 분위기가 작품 전반을 아우르고 있다.


<도서관>이 모든 책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게 공표되었을 때 사람들이 받은 첫 느낌은 엄청난 행복감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손에 닿지 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어떤 보물의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육각형 진열실에 가면 그 어떤 개인적 문제나 세계 보편적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을 수가 있었다. 우주는 그 존재 이유가 밝혀졌고, 우주는 순식간에 무궁무진한 희망의 차원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변론서’들이 크게 화제가 되었다. 그것들은 영원히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진 고유성을 변호하고, 그리고 그의 미래에 대한 깜짝 놀랄 만한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는 참회서와 예언서들이었다. 탐욕스러운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자신들이 살았던 행복했던 도서관을 버렸고, 각자 자신의 ‘변론서’를 찾으려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층계 위로 내달았다. 그 순례자들은 비좁은 낭하에서 서로 논쟁을 벌이고, 음험한 악담들을 지껄이고, 신성한 층계에서 서로를 목 졸라 죽이고, 자신의 ‘변론서’로 잘못 알았던 책들을 터널의 밑바닥에 버렸고, 뒤이어 당도한 사람들에게 떠밀려 죽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정신이상이 되어버렸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바벨의 도서관, 픽션들, 민음사, p.137.


내가 <바벨의 도서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라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보았다. <바벨의 도서관>의 '도서관'은 세상의 모든 책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도서관'이 세상의 모든 책을 갖추고 있다면 내 삶을 다룬 일종의 정석, 연대기, 변론서와 같은 것들이 '도서관'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변론서'를 찾으러 '도서관' 안으로 길을 떠난 사람들은 서로 다투고 죽이고 미치게 되었다. 나만의 '변론서'가 도서관 어딘가에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도서관의 책은 무한히 많기 때문에 내가 나의 '변론서'를 찾을 확률은 0에 수렴한다. '변론서'를 찾으러 길을 떠나는 자를 기다리는 운명은 영원한 절망과 그로 인한 광기뿐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나는 그 오래된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도서관'은 한계가 없지만 주기적이다.> 만약 어떤 순례자가 어느 방향에서 시작했건 간에 도서관을 가로질렀다고 하자. 몇 세기 후에 그는 똑같은 무질서―이 무질서도 반복되면 질서가 되리라, 신적인 질서―속에서 똑같은 책들이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리라. 나는 고독 속에서 이 아름다운 기다림으로 가슴이 설레고 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바벨의 도서관, 픽션들, 민음사, p.143.


작품의 첫 문장부터 '도서관'이 '우주' 자체라고 선언했으므로, 우리는 나만의 '변론서'를 찾아 떠나는 일의 위험을 알아야 한다. '변론서'로 상징되는 변하지 않고 절대적인 단 하나의 정답(이것은 진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에 집착하는 것은 절망과 광기로 끝날뿐이다. 그렇다면 '도서관'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세계를 올바르게 여행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보르헤스가 내놓은 답은 '신적인 무질서'에서 나름의 질서를 발견하도록 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답은 지나치게 현학적이며 델포이의 신탁처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아마 그는 우리에게 쉽게 답을 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다만, 이 우주의 본질은 무질서이므로 어떤 목적을 향해 달리기만 해서는 그 목적에 결코 다다를 수 없다는 사실만 이야기할 뿐.


알지 못하는 길을 헤메기


나는 물리학자이므로, '도서관'을 여행하는 올바른 방법에 대해 내 삶의 방식으로만 답할 수밖에 없다. 학자들은 '도서관'에서 평생 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다. 그들은 '도서관'으로 상징되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이 세상 어딘가에 불변의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때때로 진리의 단편이 반짝이는 것을 보지만, 그것은 결코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그들이 찾은 그것은 진리의 단편이거나, 진리의 투영일 뿐 그들에게 진리는 영원히 먼 곳에 있다. 뉴턴이 역학 법칙을 발견했을 때 그는 완전한 진리를 발견했다고 믿었지만, 아인슈타인에 의해 그 불변성은 깨졌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뉴턴의 법칙이 어떤 한계 안에서만 옳은 것임을 말했다. 


그렇다면 상대성 이론 또한 완전한 진리였을까? 그것은 아니었다. 20세기의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을 만듦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이론 또한 어떤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처럼 과학의 법칙들 또한 나름의 한계와 범위를 가지므로, 각각은 완전한 진리 자체라기보다는 진리의 일부분을 조명하는 이론일 뿐이다 [1].


학문에서 완전한 진리를 발견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면, 나는 '도서관'에서 길을 헤맨다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해야 한다. 보르헤스가 말하는 것처럼 완전한 진리('변론서')를 찾는 맹목적인 길 끝에는 파멸뿐이므로 나는 '신적인 무질서' 안에서 '고독 속에서 이 아름다운 기다림'으로 길을 헤매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길을 헤맨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학자들은 상아탑 안의 고요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의 내면에는 크고 작은 두려움이 가득하다. 내가 지금 길을 잃고 끊긴 길로 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이렇게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과연 옳은 질문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 분명 우리는 미로의 초입에서 미로의 길을 안다고 생각하며 길을 떠나지만, 금세 길을 잃는다. 때로는 길을 잃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커서 나를 압도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그 두려움을 떨치려고 노력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길을 헤매는 나에게 그 여행을 그만두게 하지 못하는 것은, 길을 잃었을 때 우연히 나에게 찾아오는 반짝임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미로의 초입에서 생각한 길로 목적지에 다다랐다면 알지 못했을 것들이 길을 잃었기 때문에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대학원생일 때와 몇 년의 포닥 과정을 거치며 돌아보면, 나는 내가 도달하려고 한 목적지에서 배운 것보다 길을 잃고 다다른 막다른 길에서 배운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길을 헤매는 것이 지금까지 나를 성장시켰고, 나는 앞으로도 길을 잃어야 한다.


길을 잃고 나서야 찾는 것들


학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에서 진리를 찾는다. 그것이 학자에게는 학문적 진리로 나타난 것이고, 장인에게는 어떤 경지로 나타날 것이며, 가장에게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벨의 도서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그 '진리'에 집착하지 말라는 잠언일 것이다. 우리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신적인 무질서'는 우리가 길을 잃어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을 미로 곳곳에 숨겨 놓았기 때문이다. 맹목은 항상 오답을 향하게 되어 있고,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곧장 가로지르는 여행 방법은 미로 안에서는 소용없는 방법이다. 우리는 미로를 여행하듯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 왕도는 없다. 미로 안의 절망과 환희 모두를 포용하며 길을 잃는 것만이 우리가 이 세계를 여행하는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2].


[1] 사실 내게는 진리의 완전성은 크게 관심 있는 주제는 아니다. 물론 내가 만물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물의 이론이 완성된다고 해도 그것은 물리학의 뼈대를 보여줄 뿐 그 뼈대 안에 붙어 있는 다른 물리 모두를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만물의 이론이 밝혀졌다고 해서 반도체를 다루는 고체물리나 빛을 다루는 광학과 같은 물리학의 세부 분야가 만물의 이론을 이용하여 반도체와 빛을 연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만물의 이론이 물리학의 세부 분야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새로운 부분을 조명할 여지는 있을 것이다.)


[2] 그리고 '진리'에 집착하지 말고 길을 잃는 "아름다운 기다림"을 향유하라는 보르헤스의 잠언마저도 절대적으로 믿을 것은 아니다. 답은 각자에게 다양한 형태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 기고 콘텐츠는 이웃집과학자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물리학자 J(seokjaeyoo.nano@gmail.com)

빛을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사랑하는 예술과 과학 이야기

원문 출처 : https://brunch.co.kr/@beyond-here/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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